소망 말씀(설교 말씀)

노블레스 오블리주 (느헤미야 3:28-32)

분당소망교회 2021. 5. 29. 07:13

노블레스 오블리주

 

 

 

느헤미야 3: 28~32 

 

 

선진국 사회를 지탱하는 힘은 무엇일가? 많은 사람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말합니다.

미국이란 나라에 희한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래도 빌 게이츠나 위렌 버핏 같은 분들을 보면 저런 분들이 있어서 미국이란 희한한 나라가 지탱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귀한 신분은 더 많은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프랑스 격언이 노블리스 오블리주입니다. 고귀한 신분을 말하는 노블리스 그리고 책임이 있다는 오블리주가 결합된 말입니다.

 

영국 왕실의 재산은 대단합니다. 또 영국 왕실에 영국 국가가 주는 혜택도 대단합니다. 세금이라든지 여러 가지가 많습니다. 영국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비민주적인 혜택에 대해서 물론 말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런 영국의 왕실이 큰 문제없이 지속적으로 그런 혜택을 받고 누리고 있습니다. 오히려 영국 국민들의 왕실에 대한 자부심과 환호는 놀랄 정도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누가 말했듯이 민주주의 원조인 영국에서 왕실이 건재하고 국민의 존경을 받는 것은 결단코 우연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영국 왕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은 아주 유명합니다. 모병제인데도 영국 왕실의 남자들은 모두 군복무를 자원합니다. 하나의 전통이지만 이미 법처럼 굳혀졌습니다. 1,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 고위층 자제들이 다니는 이튼 스쿨 출신 전사자는 이천 명이 넘었습니다. 그 수는 영국 일반 서민 가정 자녀들의 희생자의 몇 배의 비율입니다. 영국의 왕위 계승 서열 3위 해리 왕자는 아프간 전쟁 때, 한참 탈레반 무장 세력과 대치중인 아프칸 헬만드 주에 배치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공주였던 엘리자베스 2세는 여성 운전병 현역으로 복무했습니다. 찰스 황태자의 동생인 엔드류 왕자는 포클랜드 전쟁 대 헬기 조종사로 참전했습니다.

마치 이런 소리가 영국 왕실로부터 들리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식들을 그렇게 보내고 우리 자식들은 그렇게 갑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나라의 못된 특권층이 말하는 소리도 들리는 듯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식들을 이렇게 빼돌립니다.’

이러니 국민들은 모든 면에서 죽으라고 힘쓰고 애쓰고 희생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진입하기는커녕 중진국도 제대로 못 지킬 듯 비틀 비틀 위태롭기만 합니다.

 

어느 시대나 다 그렇듯이 모두가 부담하는 국가적인 일이나 공동체적인 일에 모두가 다 부담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담하지 않는 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직위의 힘, 돈의 힘, 또 어떤 힘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어떤 힘이든지 동원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거꾸로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딱 맞는 프랑스 말이 또 하나 없습니다. ‘노블레스 말라드 병들고 부패한 귀족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썩은 귀족, 썩은 특권층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일은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있습니다.

 

느헤미야 3장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민족의 숙원이요 염원인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동참한 사람들의 명단입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그 당시 아직까지 자기 집안의 일은 거의 손을 못 댄 상태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수많은 유대인들, 거의 대부분 유대인들이 민족의 숙원사업, 나라의 큰 일에 동참했습니다. 그 명단이 느헤미야 3 1절부터 마지막 32절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그런 명단이 이어지는 가운데 !’라는 말이 나오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들의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하지 아니하였으며라는 5절 말씀입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은 부끄러운 것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저 먼 나라에도 물론 있겠지만 가까운 우리나라에서도 온갖 곳에 다 있습니다. 부끄러운 것을 모르는 사람, 자기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고귀한 신분이라고 다 진짜 고귀한 신분은 아닙니다. 부자라고 다 진짜 부자가 아닙니다. ‘진짜 부자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 3 1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회 지도자라는 사람들 거의 다 그랬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나라에 사회 지도자라는 이름을 정말로 붙이고 싶지 않은 사람-그래서 제가 고민을 하다가 그 앞에 소위라는 말을 붙였습니다-그런 소위 사회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도대체 뭘 모릅니다. 누가 지적하면 전혀 아니라고 온갖 변명을 다하고 온갖 궤변을 다 늘어놓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그런 일이 있으면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온갖 소리를 다하는 나라가 지금 이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에 있어서 여러분들이 주의하실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일이 있어도 절대로 여러분들은 나서서 그 사람들을 책망하고 비난하고 정죄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여러분들이 보고 판단하는 것이 틀릴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눈에는 이것은 정말로 비난 받아야할 사람들이라고 보이지만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라고 말씀하십니다. 종들이 주인에게 와서 말했다. ‘주인님, 밭에 가라지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주인님, 우리가 밭에 가서 그 가라지를 다 뽑아버릴까요?’ 그러자 주인이 아니야, 가만 두어라. 너희들이 가라지를 뽑으려고 하다가 가라지가 아니라 곡식을 뽑을 가능성이 많다. 나중에 때가 되면 전문가들을 불러 뽑을 테니까 너희들은 가만히 있어라.’틀릴 가능성, 잘못 판단할 가능성이 많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각별하게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원수 갚는 것은 여러분들이 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하는 일이다. 심판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이다. 여러분들은 절대로 원수 갚는 일이나 심판하는 일에 나서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19)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쳐다보고 계십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십니다. 상 줄 사람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상을 주시고, 벌 줄 사람에게는 엄중하게 벌을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나서서 비난하고 판단하고 책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괜히 여러분들만 속상하고, 잘못하면 잘못 판단한 그 부담까지 여러분들이 가지게 됩니다.

 

이제 느헤미야 3장에서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민족의 염원, 국가적인 일 성벽 재건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을 살펴봅니다.

첫 번째, 1절부터 5절까지는 예루살렘 성벽 북쪽입니다 그곳은 적들의 공격에 제일 많이 노출된 곳입니다. 적들이 쳐들어왔다하면 북쪽에서 쳐들어옵니다. 가장 위험한 곳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곳은 누가 감당해야할까요? 1절에 말씀에 당장 그것이 나옵니다.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서..

대제사장 집안이 감당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제일 큰 어른 집안입니다. 제일 큰 어른 집안이 이렇게 위험한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고 우리가 해야 한다, 우리가 할 테니 여러분들은 다른 일을 하라고 자기들이 솔선수범해서 제일 어려운 곳, 제일 위험한 곳을 담당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다른 일을 잘 감당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진짜 어른은 이런 것입니다. 나이 많다, 돈이 많다, 직위가 높다, 직분이 있다는 이것은 어른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허울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0장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세상 권력자들은 백성을 지배하려고 하고 내리 누른다고 말씀하십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자기도 뻔히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는 것을 여러분들의 눈으로 많이 볼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너희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고,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어야한다고 하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하리라’(10:43-44)

사람들 가운데 다른 사람의 이 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될 때는 자기에게 도움이 될 만한 더 큰 사람, 더 높은 사람에게만 종노릇하고 종질을 합니다. 세상이, 그 누가 뭐라 하든 간에 아랑곳하지 않고 종질을 참 잘합니다. 그러나 힘없고 약한 국민들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힘들게 살아갈 우리 젊은이들, 우리 후배들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짜 으뜸이 될 만한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는 정말로 그렇습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정말로 제대로 믿는 사람들은 더 많이 부담하고 더 많이 수고하고 그러면서도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합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고 아무리 세상적으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인들, 기독교에서 진짜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자녀들을 그런 사람으로 만드십시오.

 

두 번째, 6절에서 13절입니다. 이곳은 파괴가 제일 심한 지역입니다. 파괴가 심한 지역은 해야 할 일이 많은 곳입니다.

당시 성벽 재건 공사비용은 전부 다 자기 부담이었습니다. 세금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내놓은 돈이 아니라 내 돈으로 다 감당해야 했습니다. 돈이 제일 많이 드는 그 곳에 누가 감당해야했습니까?

그 다음은 금장색 할해야의 아들 웃시엘 등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향품 장사 하나냐 등이 중수하되 그들이 예루살렘의 넓은 성벽까지 하였고.. 라는 8절 말씀을 보면 대표적인 면면들이 보입니다. 첫 번째로 금장색이 보입니다. 그 다음은 향품 장사입니다. 이 사람들은 소상공인, 상공업자들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대체로 이분들이 조금 넉넉합니다. 넉넉한 사람들이 돈이 많이 드는 곳을 감당했습니다. 많이 받는 사람들이 많이 참여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진정한 평등, 공평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공평, 평등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평등이라는 말, 공평이라는 말은 좋은데, 이것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도 알 만한 사람들임에도 자기네 이익에 따라 마음대로 사용합니다.

지금 이 나라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못난 사람들, 흔히 대단치 못한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라 잘난 사람들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누가복음 12 48절에서 예수님께서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고 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여러분 가운데 많이 받은 사람이 있느냐?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돌려 내놓아야한다. 많이 맡긴 사람들에게는 내가 더 달라고 할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12절입니다. ‘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할레헤스의 아들 살룸과 그의 딸들이 중수하였고

살롬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딸들만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핑계만 있으면, 핑계가 없어도 없는 핑계를 만들어서 빠지려고 하는 행태를 작금 수없이 보고 있습니다.

남자가 없으면 얼마든지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데, 이 살룸의 집안은 어떻게 하든 간에 우리 집에 남자가 없다고 우리를 빼지 말고 딸만 있는 우리도 참여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시대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랬습니다. 모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 교회가 있는 유대 지방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습니다. 모두가 극심한 가난에 힘들 때 교회가 구제헌금을 하기로 했습니다. 흩어져 있는 여러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구제 헌금을 하는데 그 교회들 중에는 예루살렘 교회보다 더 가난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도 그 일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당시 교회의 어른들은 당신네들이 처지가 어떠한데, 안 해도 된다..’고 말렸습니다. 그럼에도 하도 부탁을 하자 그들의 마음이 섭섭하지 않도록 할 수없이 허락은 하는데, ‘그저 흉내만 내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 허락을 받고 너무 좋아합니다. 그런데 다른 어떤 곳보다 가난했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비교적 넉넉한 다른 교회들보다 더 많이 참여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네 번째 14절에서 19절입니다. 남동쪽 지역인데 일곱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일곱 구역 중에서 여섯 구역을 담당한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 밖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일입니다. 나라의 큰 염원입니다. 한편 예루살렘 성벽이 다 완공되면 국민들이 혜택을 받습니다. 외적이 마음대로 쳐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남동쪽 재건 지역 일곱 구역 중 여섯 구역을 담당한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은 성벽이 완성이 되어도 받을 혜택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곱 구역 중에서 여섯 구역을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 일을 담당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해관계가 밝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어떤 일이 있으면 이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것이 나에게 득이 될까 아니면 손해가 될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계산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람 기계 자체가 다릅니다. 이런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계산하지 못합니다. 인생 자체가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내가 득일까 손해일까? 가 아니라 이 일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실까 아닐까? 이런 쪽으로 인생 기계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생각, 삶의 중심축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다섯 번째, 20절에서 32절까지로 상당히 깁니다. 동쪽 지역입니다.

이 부분을 읽다보면 이전에 나왔던 사람들과 같은 이름들이 나옵니다. 동명이인인가 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동명이인이 아니라 앞에서 다른 지역 일을 담당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맞습니다.

어떻게 하든 간에 할 수만 있으면 참여하지 않으려고 하고, 나는 이미 했으니 이제는 되었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음에도 아직 다하지 못한 곳이 있는지 살펴보고 더 담당하고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 여호수아에게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미 정복한 땅도 있었지만 정복하지 못한 땅도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의 고민은 그 중에서 아주 험한 땅 그리고 상당히 강한 사람들이 사는 땅이 있었는데 그 땅을 누구에게 분배할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그 땅을 분배받은 사람들은 그런 땅을 받게 되었다고 원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오래 전 옛날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땅에 가서 정탐했던 열 두 사람들 가운데 믿음의 사람이 둘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인 갈렙이 여호수아를 찾아왔습니다. 갈렙이 말합니다, ‘여호수아님, 내 나이 팔십오 세입니다만 내 힘이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강건하고 싸울 만합니다. 그곳, 아무도 차지하려고 하지 않는 그곳, 다 두려워서 외면하는 그 땅을 나에게 맡겨주십시오. 아무리 크고 견고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만 하며 얼마든지 쫓아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느헤미야 3장 그리고 갈렙을 보면서 이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분이 좋으실까 얼마나 행복할까를 생각합니다. 우리가 볼 때도 기분이 좋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느헤미야 3장을 읽으면 참 힘듭니다. 그래서 대강 대강 읽습니다. 이런 내용을 알고 느헤미야 3장을 읽으면 읽을 때마다 여러분들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란, 기독교인이란 이런 것이구나. 내가 아직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음에도 마치 내가 그런 사람이 된 것처럼 행복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가 이만큼 기분이 좋고 행복한데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좋으시겠습니까?

참으로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보고 그렇게 좋아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면 좋아하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좋아하심이 반드시 그 사람의 현실로 옵니다. 그 사람의 모든 문제, 예를 들면 경제 문제, 자녀문제, 건강문제에 있어서 이 사람도 하나님과 함께 좋아하고 행복하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좋으셨다, 행복하셨다는 말의 참된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19:17)라고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으로부터 그런 소리를 들으시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기분 좋게 행복하게 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