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들
누가복음 1:1~4
요즘 TV는 물론이고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를 볼 때마다 정말로 속상해서 못 볼 정도입니다. TV 뉴스 보는 것을 끊었습니다만 뉴스를 안 볼 수가 없어서 인터넷이나 신문 뉴스를 가려가면서 보는 데도 마음이 불편할 때가 많습니다. 어둡고 안 좋은 모습들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때로는 일반시민들까지 우리 마음을 무겁게 씁쓸하게 슬프게 하는 일들도 많이 보도가 됩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국민들의 그 귀한 낸 세금을 자기네들 마음대로 쓰면서 도대체 국민을 생각하는 것이 없습니다. 국민의 마음을 편하게 하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저 정권, 그저 표만 생각합니다. 이러다가 이 나라가 어떻게 될까? 걱정이 많이 됩니다.
근처에 장애인 학교가 들어서면 집값이 떨어진다고 결사반대 외치는 어른들, 그런 어른들 중 어린 아이들까지 데리고 오는 정말 철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음 세대를 이어나갈 어린이들에게, 젊은 세대들에게까지 그런 각박한 모습, 정말 보고 싶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걱정스러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러다가 이 나라가 어떻게 될까? 다음 세대는 어떤 세대가 될까..?
초등학교 졸업식장에 박수가 없답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아이가 상을 받을 때 박수를 치기 싫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합니다. 같은 학급에 지진 아동이나 장애아동이 들어왔다고 해서 학급의 학부모들이 다 일어서서 반대를 합니다. 기어이 그 아이를 다른 학교로 쫓아 보내는 일들도 있습니다. 내 자식은 한없이 좋은 교육을 시키고 싶어 하면서 그것을 위해서 다른 아이들, 그 아이들의 부모들이 상처를 받고 한없이 슬프게 되는 일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우리 가슴을 너무도 아프게 하고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일들, 여러분들은 꼭 잘 아시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전해주십시오. 가르쳐주십시오.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곧 자기의 슬픔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주인이시고 자비의 하나님이시고 인자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을 그냥 넘어가시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가 고통 받고 내가 수고하고 내 주머니 털어서 다른 사람 허리를 펴게 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것이 곧 자기의 기쁨이 되고 자기의 행복이 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도 가르쳐 주십시오. 여러분들은 세상 사람들을 가르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인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뿐만 아니라 우리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이야기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먼 나라의 아름다운 이야기, 너무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나 여러분들과 나눕니다.
영국의 한 초등학교에 일곱 살짜리, 좋은 말로 청각장애아, 좋지 않은 말로 귀머거리 학생 하나가 입학했습니다. 아이 부모가 선천적으로 청각장애인 아들을 일반학교에 보내기를 소원했기 때문입니다. 입학을 요청했습니다. 이 요청을 받은 학교는 학교 위원회를 개최합니다. 선생님들과 학부모 대표들이 모여서 학교 위원회가 회의를 하고 논의한 끝에 그 학생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합니다.
그 결정이 나자마다 학교는 그 아이를 위해서 수화를 담당하는 선생님을 채용했습니다. 그 후 그 학급에는 두 분의 선생님이 계시게 되었습니다. 교단 한쪽에는 수업을 담당하는 선생님, 교단 또 한 쪽에는 수화를 담당하는 선생님입니다. 수업을 담당하는 선생님의 가르침이 일단락되면 한 아이만을 위해서 수화를 담당하는 선생님이 말을 전합니다. 참으로 귀한 것은 학급의 어린 아이들이 수업 담당선생님의 말이 끝난 다음에 수화 담당하는 선생님과 청각장애아이가 말을 주고받는 동안의 그 지루함을 잘 견뎌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뿐만 아닙니다. 아이들이 이 장애 아이와 사귀기 위해서 앞 다투어 수화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년이 조금 지난 후에 처음에는 인사조차도 꺼렸던 아이들이 장애인 아이와 의사소통을 자유자재로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학급 학생 모두가 자유자재로 수화로 그 아이와 소통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학급 아이들뿐만 아니라 그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상당수가 수화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학교는 나중에 수화 합창단까지 만들었습니다.
참으로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저 멀리서 전해진 이야기, 그 따뜻함이 여기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림을 그려봅니다. 그 아이들 가슴 속에 학교가 따뜻하고 아름다움을 심어주었습니다. 학교 결정,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의 결정이 학교 전체 아이들에게 따뜻함과 아름다움을 심어 주었고, 그 아름다움과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나중에 장성하여 어른이 되었을 때, 그 아름다운 아이들이 사회 각처에서 각양의 아름다움과 따뜻함을 만들 것을 생각하니 흥분이 됩니다. 이 사람에게도 따뜻함을 저 사람에게도 아름다움을 나누어줄 것을 생각하니 남의 나라 이야기인데도 정말로 감사하고 훈훈하고 그리고 고맙고 기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알려진 누가복음은 다음 연유로 써졌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서 로마군 감옥에 갇혀있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바울과 함께 선교팀으로 다니던 누가가 생각합니다. ‘저렇게 열심히 충성스럽게 선교하신 바울, 그냥 열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놀라운 능력으로 복음을 힘 있게 전하신 바울, 왜 저런 분을 하나님께서 감옥에 갇히게 하셨을까? 왜 저렇게 오랫동안 감옥에 있게 하시는가? 까닭이 있을 텐데 무엇일까?’ 기도하던 누가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얘야 누가야, 너 이 기회에 기독교를 소개하는 책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보게 하여라.’ 이 주님의 음성을 들은 누가는 곧 책을 쓰기를 착수했습니다.
그 당시에 이미 기독교 서적이 마가복음, 마태복음 두 권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새롭게 기독교를 소개하는 책 쓰기로 합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1-4절)
여기서 ‘데오빌로’ 라는 이름은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편지나 글을 쓸 때 편지 형태나 서간문 형태로 쓰는 일이 많았는데, 어쩌면 데오빌로는 실제 인물이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해서 만들어 낸 가상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누가는 의사였습니다. 과학을 한 사람답게 누가는 확실한 바탕과 자료와 근거를 가지고 책을 쓰려고 작정했습니다. ‘근원부터 자세히 살핀 나도’ 라는 3절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과 관계되는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과 관계되는 사건들을 찾고 만나서 일일이 확인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어머니,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만났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많이 활동하신 갈릴리에도 가서 예수님께서 어떤 활동을 하셨고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조사했습니다.
조사 결과 누가는 상당히 두꺼운 책 한 권을 씁니다. 오늘날은 종이가 얇아서 분량이 얼마 안 되지만 그 당시에는 글자도 크고 종이도 두꺼웠기 때문에 상당히 두꺼운 책이 한 권 만들어졌습니다. 누가가 쓴 그 두꺼운 책은 예수님의 생애부터 시작해서 초대 교회의 일들 그리고 사도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 또 사도 바울의 활동들, 교회는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등의 내용들을 자세하게 썼습니다.
그 책을 나중의 성경학자들이 편집을 합니다. 두꺼운 하나의 책을 두 권의 책으로 분리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생애,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고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에 관해서, 또 하나는 기독교와 교회의 역사, 사도들과 사역자들의 일들 두 권으로 분리했습니다. 그 중에서 예수님의 생애는 누가복음이라는 이름으로 복음서에 포함시켰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과 함께 복음서 쪽으로 분류했고, 교회의 역사와 사도들의 활동사항 등은 사도행전이라는 이름으로 그 뒤에 넣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두 권의 책인 것 같지만 원래 한권의 책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 권의 책이 생겨났습니다.
‘기독교란 이런 종교이다.’ 라는 안내 목적으로 책을 쓰면서 누가는 기왕에 있던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 중에서 이것은 기독교 그리고 기독교 신자들에게 꼭 있어야할 것, 기독교를 소개하는데 빠져서는 안 될 것, 가장 기독교적인 몇 가지를 추가했습니다. 그 결과 누가복음은 세상에서 가장 기독교적인 책, 가장 아름다운 책이 됩니다. 이렇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나왔습니다.
이 누가복음에 추가된 내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 그리고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란 특히 이런 종교이고 기독교 신자란 특히 이런 사람들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기독교 그리고 기독교 신자들은 환영받지 못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당시의 목자들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세상 사람들에게 안 좋은 사람으로 비추어졌습니다. 그 당시 목자들은 남의 양을 훔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목자들을 믿지 않고 도둑으로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면, 재판에서 증인을 세울 때 목자들은 증인의 자격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증인으로 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정도로 목자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맨 처음에 받고 전한 사람들이 바로 그런 목자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기독교는 소외되고 인격자로 취급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긴다는 말씀입니다.
또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람 취급으로 못 받고 개로 여겨졌는데, 이때 말하는 개는 요즘 보는 예쁜 개가 아닙니다. 추한 개, 떠돌이 개, 비루 맞은 개를 말합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런 개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모두가 외면한 죽어가는 사람을 챙겨준 사람은 그 잘난 제사장도 아니고 레위인도 아니고 사람 취급 받지 못하는 비루한 동물 급 정도인 사마리아 사람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열 명을 깨끗하게 낫게 해주셨는데, 돌아와서 감사 인사를 한 인간다운 사람은 하나밖에 없더라, 그 사람은 바로 사마리아 사람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18년 동안이나 몸이 꼬부라져서 펴지 못하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앞으로 죽을 때까지 당연하게 꼬부라진 채로 살아야했습니다. 그 누구도 18년 동안 꼬부라진 여인의 삶을 조금이라도 개선 시켜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여인을 예수님께서, 그 당시에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종교지도자들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그것도 회당에서 깨끗하게 해주셨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어려움을 당하실지 충분히 아시면서도 예수님께서 깨끗하게 치료해주셨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이고 기독교 신자들은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가 아직 돌아가실 날이 멀었는데 못된 아들이 찾아와서 아버지 돌아가실 때 나누어줄 유산을 미리 달라고 했다. 그 못된 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아들이었는데 자식 이기는 아버지가 있느냐? 아버지는 아들이 조르는 대로 재산을 나누어주었다. 그 못된 아들은 받은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다 탕진하고 굶어죽게 되었는데, 굶어 죽고 싶지 않아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낯짝은 있어서 나를 아들이 아니라 일군으로라도 써 달라고 부탁하려고 아버지를 찾아갔는데, 아버지는 저 멀리서 그 아들을 보고 맨발로 쫓아 나와서 아들을 안고 새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소를 잡고 잔치를 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그런 아버지와 같다. 기독교는 이런 종교다‘
그 당시에 사람들에게 혐오대상 1위가 세리와 창녀였습니다. 세리 중의 세리 삭개오가 예수님이 보고 싶어서 나갔습니다. 모인 사람들 때문에 볼 수가 없어서 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을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 가운데 지나가실 때, 예수님께서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삭개오를 가리켜서,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해야 되겠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누가복음만 기록했습니다. 기독교는 사람들이 혐오하는 사람들까지 사랑하고 아끼는 종교이다, 기독교 신자란 그런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 기독교는, 기독교 신자들은 가난하고 힘없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그들을 위해서 챙겨주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한 부자가 있었는데 재산을 많이 모았다. 어느 날 부자는 혼자 생각한다. ’이제 넉넉하다. 죽을 때까지 걱정 없게 살겠구나. 이제부터 실컷 먹고 마시고 즐기자.‘ 그 부자를 보고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단다. ’이보게, 오늘 밤 내가 자네를 데리고 가면 자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재산 그렇게 쌓아놓고 귀하게 여기는 재산이 다 누구 것이 되겠는가? 기독교 신자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누어주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기독교와 기독교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호화롭게 사는 부자가 있었는데, 좋은 옷 입고 음식도 좋은 음식을 먹고 살아가는 부자가, 자기는 그렇게 살면서도 자기 집 앞에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먹고 사는 거지를 한 번도 돌아본 적이 없고 외면했다. 둘 다 죽었다. 거지는 천국에서 위로를 받는데, 부자는 물 한 방울 아쉬운 뜨거운 곳에서 죽을 고생을 당하게 되었다. 기독교 신자들은 절대로 그럴 일을 당할 인생을 살지 않는다.’ 이것을 누가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인들이 왜 그런 고통을 당하겠는가? 기독교인들은 없는 사람 나누어주고 입히고 먹여주고 마시게 하고 힘없는 사람 무릎을 채워주고 비틀거리는 사람을 부축해주는 그런 사람들이 아닌가?’ 이것을 누가복음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말씀하십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항상 기도하는데, 잠시 기도하고 끝나는 사람들이 아니라 끝까지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한밤중에 급하게 필요한 것이 있어서 친구를 찾아간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그 밤에 도저히 도와줄 형편이 아니었지만 찾아온 친구가 너무도 졸라대고 부탁하니 친구관계 때문으로는 못 도와주어도 너무 간절하게 부탁하기 때문에 도와줄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친구가 그렇다면 너희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오죽 하시겠는가?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가? 아쉽고 답답하고 급해서 찾아오고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겠는가?’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힘도 없고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 과부의 억울함을 풀어줄 사람은 딱 한 사람 재판관밖에 없었는데, 그 재판관은 너무 못되고 악했다. 아무리 그 과부가 부탁해도 들어줄 재판관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과부는 밤낮으로 찾아가서 재판관이 귀찮아 죽을 정도로 사정하고 또 사정하고 매어 달렸다. 그 재판관이 생각하기를 ’내가 저 과부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지만, 안 들어주면 계속 귀찮게 할 것이니 내가 말라 죽게 생겼다. 그냥 들어주고 말자‘ 했다. 여러분에게 그런 일이 있을 때 여러분의 아버지인 하나님은 어떠하시겠느냐? 당신의 자녀들이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할 때 들어주시지 않겠느냐? 너희들은 절대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라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하다가 기도했다고 할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안 들어주실 것 같아도 그냥 끝날 것 같아도 끝까지 기도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가 누가복음을 썼는데, 누가가 쓴 글의 양이 신약 성경 전체의 30%나 됩니다. 그런데 그 많은 글들 가운데 누가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름도 얼굴도 없습니다. 입도 없습니다. 그 긴 책 중에서 누가 자기가 말했다고 한 말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어떻게 말씀하셨다, 바울은 스데반은 빌립은 어떤 말을 했다는 등 남의 말만 합니다. 자기의 주장은 물론이고 한 마디 의견도 없습니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 그대로 전했습니다. 여러 사람들로부터 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을 그대로 전할 뿐이었습니다.
누가와 같은 사람이 진짜 기독교인입니다. 기독교인도 의견은 내야합니다. 그러나 알고는 계십시오. 그 아름다운 누가, 위대한 누가, 대단한 누가는 한 번도 자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이름을 내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누가는 정말로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잠시만 충성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키도 작고 얼굴도 형편이 없었습니다. 머리는 벗겨지고 눈은 양 눈이 붙었고 거기다 다리는 안짱다리였습니다. 건강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 바울을 누가는 부하인 것처럼, 하인인 것처럼 끝까지 따라다녔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의사들은 먹고 살만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은 낫습니다. 얼마든지 누가도 돈을 벌 수가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좋게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못난’ 바울을 따라다니고 하인처럼 부하처럼 살았습니다. 바울도 수차례나 이 말을 한 것 같습니다. ‘누가님 이제는 그만 저를 도와주셔도 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가지 않았습니까? 누가님도 이제 가십시오.’ 바울의 그 말에 누가가 무슨 소리 했는가도 성경은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바울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갈 수도 있고 떠날 수도 있지만, 바울님은 몸도 허약하신데 의사인 제가 바울님 옆에 있지 않으면 누가 있겠습니까? 나는 하나님께서 바울 옆에 있으라고 보낸 사람입니다.’
바울이 죽기 바로 전에 말합니다. ‘이 사람은 이래서 저기로 떠났고 저 사람은 또 저래서 저기로 떠났고 또 어떤 사람은 내가 보냈지만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기독교는 이렇게 아름다운 종교다. 진짜 기독교인, 진정한 기독교인들은 이처럼 아름답다. 정말로 아름답다.’ 하나님 말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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