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말씀(설교 말씀)

2021년도를 어떻게 살아야..? (여호수아 3:7-13)

분당소망교회 2021. 6. 11. 10:17

“2021년도를 어떻게 살아야..?”

 

 

 

여호수아 3:7~13

 

 

2020년은 그야말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시대를 갑자기 당했습니다. 뒤통수 맞듯이 2020년을 당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할지 아무 생각 없이 끌려서 살았던 게 맞는 것 같습니다. 2021년 금년 한 해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시대, 나라, 세상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살아야할지 알기 어려운 세상인데, 거기다 전대미문 코로나사태까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할지 알기가 더욱 어려운 2021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깜깜하고 답답하고 어둡고 앞의 일을 모를 때일수록 더 기억해야할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알지 못할 때는 아는 사람이 가르쳐주는 대로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알지 못할 때는 아는 사람이 가르쳐주는 대로 살면 된다는 이 원리를 꼭 기억하십시오. 알지 못하면서 길을 가려고 하면 상당히 힘듭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 신자들은 또 하나의 커다란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때나 어떤 일에나 가장 정확한 길을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37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37:5 )

또 잠언 3장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3:4-5)

 

성경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중에 희한한 지시가 제법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으로는 희한한, 희한한 정도가 아니라 이것은 정말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지시일 것입니다. 번제는 제물을 불에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람을 그것도 자기 아들을 제물로 태워서 바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황당한 말씀에 대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제법 신앙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까지도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하나님 말씀을 인간의 잣대로 판단하다보니 인간적 경향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 논리의 틀에 가두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이든지 간에 인간의 논리의 잣대로 재다보니 맞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 예의 대표적인 하나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불순종 사건입니다.

사울이 제사장 대신 제사를 집전했습니다. 사울은 제사는 드리는 것이 중요하지 누가 집례 했느냐가 무어 그리 중요한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 생각으로 보면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 같습니다. 사울은 그래서 제사장 대신 자기가 제사를 집례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법을 정면으로 거역한 것입니다. 일리가 있든 없든, 말이 되든지 안 되든지 간에 하나님은 그것은 아닌 것으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그동안 하나님으로부터 각별하게 챙김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랬던 사울이 하나님의 눈 밖에 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만회할 기회를 주십니다. 아말렉을 공격하라고 하시면서 거기에 엄하게 덧붙이신 지시가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할 텐데, 아말렉의 모든 것을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진멸이라는 것은 하나도 안 남기고 모조리 죽여서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들도 그리고 어린아이들도, 심지어 소와 양과 낙타와 나귀까지도 다 죽여 없애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소와 양 중에서 좋은 것들을 남깁니다. 거기다 아말렉 왕도 살려서 포로로 끌고 옵니다. 사울 생각에 기름진 소와 양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서 살려두자, 모두 다 죽여 없애버리는 것은 그러지 않아도 모자라는 시대에 너무 아까운 일... 이라 생각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아말렉 왕을 포로로 끌고 온 것도 나름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적의 왕을 살려두면 언젠가는 이용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잘 아십시오. 이유가 있든 없든, 이유가 이것이든 저것이든 간에 사울이 그렇게 한 것은 불순종이 분명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그 불순종 때문에 사울은 결정적으로 하나님께 버림받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네가 나에게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너를 버렸다.’ 그 길로부터 시작해서 사울은 40년 가까이 남은 인생 내내 버림받은 마음과 미움과 분노에 잠겨서 삽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맙니다. 자기만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세 아들마저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도록 그 아버지가 그렇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와 정반대로 아브라함은 절대로 아닐 것 같은 하나님의 그 말씀에 우직하게 그대로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그 다음날 아침 일찍이 번제물로 드릴 아들 그리고 번제에 쓸 쪼갠 나무를 가지고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출발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그 모습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인정하십니다.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고 순종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완전한 책임을 지시는 모습을 잘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깜짝 놀라시고 급히 부르십니다. 두 번이나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급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양 한 마리를 아브라함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으로 번제를 드려라.’ 책임을 지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는 모양만 내고 하나님의 완전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아브라함을 보고 사울을 생각해 봅니다. 만약 사울이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여러분, 사울은 아브라함보다 얼마나 쉬웠습니까? 아깝기는 하지만 아말렉의 가축들을 다 없애버리면 됩니다. 하나님도 아까우시면서도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울도 아깝고 우리도 아깝겠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데는 항상 뜻이 있으니 아들을 바치라는 것도 아닌데 그것을 못합니까? 아말렉 왕도 나중에 용도가 있을 것이겠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니 없애버리는 것이 무엇이 그리 어렵습니까? 만약 그렇게 했다면, 하나님의 첫사랑이었던 사울,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세우신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첫사랑이었습니다, 그 사울은 아마도 다윗보다 훨씬 더 큰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혹시 이런 바보 같은 일이 나에게는 없는지 한 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 어렵지도 않은데 그것을 왜 못합니까? 아들 바치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아들 바치라는 것 같은 일은 하나님께서 아무나에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 그것을 순종하지 않고 버티고,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다가 혼자 마음고생, 몸 고생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 바보 같은 노릇을 왜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순종했느냐 안 했느냐의 여부가 사람들의 인생을 극과 극으로 나눕니다. 아브라함,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믿음의 아버지라는 별명까지 붙여주셨습니다. 사울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챙겨주셨습니다. 얼마나 사랑하시고 챙겨주셨습니까? 챙겨주시는 것을 보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기대하기 힘들 정도로 이것도 챙겨주시고 저것도 챙겨주셨습니다. 그런데 순종, 그것 하나 하지 못해서 하나님께 버림받고 그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또 다윗을 이야기합니다. 다윗이 얼마나 무서운 죄를 지었습니까? 성경에서 다윗보다 더 무서운 죄를 지은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고 또 받고 또 받습니다. 정말로 극과 극입니다.

 

이것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말은 그것이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이든지 순종해야한다,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소리,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말이라도 그것이 나의 말인 것인 것만 분명하다면 순종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모든 순간 하나님 말씀에 집중해야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시는지 집중해야합니다. 귀도 하나님께 집중하고 눈도 집중해야합니다. 이것이 깜깜하고 앞을 알 수 없는 시대 그리고 그 다음 시대 살아갈 때에 승리할 수 있는, 무난히 헤치고 나갈 수 있는 길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 입에 집중하고 하나님 모습에 집중해야합니다. 여러분 귀를 집중해야하고 눈을 집중해야합니다.

왜 이렇게 집중이라는 것을 강조하는지 그 까닭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때와 장소와 상황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옛날에는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지금은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안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안다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지금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하나님 말씀에 지금 내가 순종하고 있는가? 이것입니다. 아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때그때마다 다르기 때문에 지금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옛날에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지금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보고 들어야 하기 때문에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 본문입니다. 맨 처음 출애굽할 때에 하나님께서 홍해 바다 앞에 선 모세에게 모세야, 그 지팡이를 들어서 바다를 가리키라..그렇게 하면 너희들은 마른 땅위를 걸어가게 될 것이다.’ 그대로 되었습니다.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났습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인 요단 강 앞에 도착했습니다. 여호수아는 거의 틀림없이 40년 전에 그 광경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 대신 나를 세우셨는데 그때 모세에게 주신 그 말씀을 나에게 주실 것이다. 잔뜩 기대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팡이를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때 여호수아가 40년 전의 그 일만 생각하면서 그것만 준비하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더라면, 옛날 모세처럼 지팡이로 백번 천 번을 가리켜도 바다는 갈라지지 않았을 것이고 요단강은 건너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40년 전에는 지팡이만 가지고 바다를 가리키라고 해서 바다가 갈라졌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흐르고 있는 요단 강 위를 건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에서 첫 전쟁 때 하나님께서 전쟁 후에 어떤 사람이든 간에 전리품에는 절대 손대지 말라고 엄명하셨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아간이라는 사람이 명령을 어기고 몇 가지를 빼돌렸습니다.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 다음 두 번째 전쟁에서 절대로 패할 수 없는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가요? 하나님께서 하신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은 바로 앞 전쟁에서는 전리품을 절대로 가져서는 안 된다고 금지하신 하나님께서 두 번째 전쟁에서는 전리품을 각자가 알아서 가져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의 백성과 그의 성읍과 그의 땅을 다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오직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가지라’(8:1-2)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안다는 것을 다 땅에 내려놓아야합니다. 쓸모 없습니다. 많이 아는 것,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지금 내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순종했는가? 이것뿐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시고 하나님을 쳐다보십시오.

 

여호수아가 일생에서 단 한 번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이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두 번째 전쟁 이후에 가나안에 살고 있는 민족들이 바짝 겁을 먹고 있었습니다. 아주 멀리서 온 나라의 사신들이라고 여호수아를 찾아와서 평화조약을 체결하자고 말합니다. 그 가나안에 있는 사람들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까운데 있는 나라들과는 전쟁을 해서 점령하라, 그러나 멀리 있는 나라들과는 전쟁하지 말고 화친하라고 명령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이용해서 여호수아를 찾아온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보니 형색이 멀리서 왔습니다. 여호수아도 하나님 그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들과 평화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신들은 먼 나라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이웃나라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속은 것입니다. 사기 당한 것입니다. 왜 사기를 당했습니까? 옛날 말씀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물어봤어야 했습니다.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던 여호수아가 왜 그런 실패를 했는가? 그 이유를 성경은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조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9:14) 옛날에 어떤 말씀을 하셨지만 또 물었어야했습니다. ‘옛날에 하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지만, 이 사람들이 평화조약을 맺자고 하는데 맺어도 될까요? 안 될까요?’ 라고 물었어야 했습니다. 묻고 하나님의 대답을 듣고 그대로 했어야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통일 후, 나라가 안정이 되었습니다. 맨 처음 그가 한 생각은, 나는 백향목 화려한 궁에 사는데, 하나님께서 저 천막 속에 사시는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참 좋습니다. 그래서 성전건축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하하나님의 종에게 물었습니다. “선지자님, 제가 이런 생각을 했는데, 어떻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선지자가 그렇게 좋은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빨리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 그리고 너무도 당연한 일, 너무도 당연해서 하나님의 종도 하나님께 묻지 않은 그것까지 다윗은 물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 때문에 다윗은 어마어마한 축복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2020년은 코로나에게, 코로나 때문에 모두가 쫓기면서 밀리면서 살았습니다. 우리가 생각을 하고 살지 못했습니다. 저렇게 하겠다고 생각하고 살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밀리고 저기에 밀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새해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새해에는 그렇게 밀리지 말고 끌리지 말고 쫓기지 말고 오히려 여러분들이 끌고 사십시오. 나라도 끌고 사회도 끌고 여러분의 모든 일들을 여러분이 앞에서 끌고 사십시오. 끌고 가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어렵지 않습니다. 단 하나, 여러분들이 끊임없이 눈도 귀도 하나님께 집중해서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듣고 그렇게 하기만 하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