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맛 나게 하는 사람들”
마태복음 13:13~15
심리학 용어에 ‘frequency effect’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빈발효과’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빈번하게 발생되는 정도는 앞의 정도를 지운다는 말입니다. 내가 정말로 믿고 신뢰하고 존경하는 사람에 대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 사람은 그럴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여러 번 듣게 되면, 지금까지 내가 그 사람을 정말로 믿을만한 사람이다, 존경할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것이 내 마음 속에서 지워지고, 대신 내 마음 속에 저 사람은 믿지 못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된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전 세계에서 이름을 떨치는 이유 중에 큰 이유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부모들은 십분의 일, 백분의 일만 해도 아이들에게 밉상 받겠다 싶어서 하지 않을 말을 그들은 끊임없이 합니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합니다. 그 결과가 유대인들이 세상에서 제일 뛰어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빈번효과를 내는 회수를 세 번 내지 다섯 번이라고 합니다. 같은 말을 세 번에서 다섯 번 듣거나 혹은 같은 이야기를 세 사람에서 다섯 사람에게 들으면 그 말이 믿기어진다는 말입니다.
가장 좋은 예가 ‘벌거벗은 임금님’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내가 보니 틀림없이 벗었습니다. 아무 옷을 안 입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도 ‘아니야 우리 임금인은 이렇게 멋진 옷을 입고 있어.’ 라고 말하고, 또 저 사람도 그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자꾸 듣다 보니 지금까지는 발가벗었는데 이제는 멋있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 그렇게 힘들게 어렵게 살려고 하는가? 이제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 살아라. 돈을 벌어야한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돈을 벌어야한다. 그것도 많이 벌면 벌수록 좋다. 노후를 위해서 상당히 준비해야한다, 지금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준비해야한다. 그것으로 모자란다. 더 많이 준비해야한다..당신을 위할 사람은 결국은 당신 자신밖에 없다.’ 이런 소리를 자꾸 듣게 되면 그 말이 진리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반대로 말합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불쌍히 여겨라.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라. 내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기독교는 계속해서 이 말씀을 합니다. 따라서 참된 기독교 신자는 늘 당합니다. 늘 손해를 봅니다. 더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일수록, 더 신앙생활이 길어질수록 바보 같은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이 생각하기에 바보 같은 그런 말을 계속해서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듣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만큼은 아십시오. 여러분들이 그렇게 바보가 되고 손해보고 여러분들이 당하는 대신에 여러분들의 이웃은 여러분 때문에 조금은 더 넉넉해진다는 것, 조금은 더 풍요로워진다는 것, 여러분 때문에 그 사람 홀로서는 제대로 살지 못하던 사람이 홀로 서고 조금은 더 살맛나는 세상을 살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을 아십시오.
그렇게 살다간 여러분은 어떻게 사느냐고요? 여러분은 하나님께 받으면 됩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세상에게 받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이 살맛이 없다. 재미가 없다, 세상이 어둡다. 나라가 잘못되고 사회가 썩어간다. 이런 말들을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그렇게 안 됩니다. 마음 아플 때가 많고 속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할 것은 세상이 어두운 것은 빛이 없기 때문이고, 썩는 것은 썩는 것을 방지하는 방부제가 들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맛이 없는 것은 맛을 내는 소금을 치지 않아서입니다. 저는 설렁탕 종류를 먹을 때 소금을 치지 않습니다. ‘맨 탕’을 맛있게 먹습니다. 그런데 어떤 설렁탕 집에는 아예 기본적으로 소금을 어느 정도 넣어줍니다. 그런데 그것을 먹으면 제가 맹탕으로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습니다. 맛이 없는 것은 소금을 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어두운 것, 사회에 어둠이 가득하고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뇌 속에는 내적 시계가 있습니다. 내적 시계는 빛을 통해서 신경계와 몸의 여러 리듬, 예를 들면 심박동, 호흡, 수면 등 몸의 리듬을 조절합니다. 여러분의 건강은 사실은 여러분 몸에 있는 내적 시계가 어떻게 조절하는가에 따라서 많이 달라집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사람들의 자살률이 상당히 놓는데,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빛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울증을 좌우하는 빛은 태양의 빛뿐만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빛에 의해서도 좌우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사람에게서 나오는 빛에 의해서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즉 세상이 어둡고 살만하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우울하고 사람들이 힘든 것은, 빛을 발하는 사람이 없고 썩지 않게 하는 사람이 없고 살맛나게 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줄어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기독교인들이 알아야할 것, 우리가 엄숙하게 질문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것은 누가 해야 하는가? 세상을 맛있게 하고 썩지 않게 하는 것은 누가 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다 이럴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탓을 돌립니다. 정부가 잘못했고, 나라의 지도자들이 잘못했다, 누가 그 일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신자들이 해야 합니다. 교회가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빛을 세상에 비추라’ 우리들에게 기독교인들에게 그 일을 담당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실제에 있어서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상당히 힘듭니다. 목사님들이 틈나는 대로 이런 말씀을 많이 드립니다만 사실은 목사 자신도 쉽지 않습니다. 나 자신 하나도 내 가정 하나도 제대로 건사하기 어려운 현실인데, 이 세상을 나라를 이 사회를 이웃을 챙길 수 있는가? 언감생심 어렵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왜 그렇지 않은지 예수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빛을 세상에 비추라’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할 수가 있고, 그렇게 힘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들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말로 힘든 일이면 여러분에게 부탁하지 않습니다. 지시하지 않으십니다. 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부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빛이 되고 빛의 역할,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가?
먼저는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실 때 어떻게 하셨는지 정확하게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빛이 되어라, 소금이 되어라’ 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세상의 빛이다. 여러분들은 세상의 소금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직 빛이 아니고 소금이 아닌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은 이미 빛이고 이미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 이것이 워낙 중요합니다. 실제로 나 자신을 볼 때, 우리 자신을 볼 때,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볼 때에 전혀 소금도 아닌 것 같고 빛도 아닌 것 같고 감당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인정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빛과 소금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아시면서도 하신 말씀, 여러분들이 그렇게 느끼든지 아니든지, 인정하든지 못하든지 여러분들이 부끄러움을 느끼든지 말든지 간에 여러분들은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제대로 하지 못해도 나는 빛이고 소금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고 인정하고 이것을 말하면서 살아가야합니다.
한 기독교 신자가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한 주일 내내 끔찍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할 일은 산더미 같은데 도무지 어떤 일부터 시작해야할지 몰랐습니다. 이것을 잡으면 이것이 아닌 것 같아 놓아버리고, 또 다른 일을 잡으면 또 아닌 것 같아 놓아버리고.. 하나도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어도 일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손발이 맞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집에 돌아와서 가족들하고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기진맥진되었습니다. 절망에 빠졌습니다. 한 주간, 월 화 수 목 금요일 내내 이렇게 살다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러다가 그 다음 토요일 아침에 마음을 정돈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가운데 구절 하나가 눈에 번쩍 뛰어 들어왔습니다. 큰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는 지금까지 자기를 빛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너는 빛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 그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야말로 대단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자신 없지만 예수님께서 저에게 너는 빛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제 다음 한 주간 제가 빛을 비추는 한 주간이 되게 해주십시오.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는 사람이 되게 해주시고, 제가 하는 일에도 빛을 비추게 하여 주시고, 제가 참석하는 모든 회의에서 저로 하여금 빛을 비출 수 있게 해주십시오.’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다음 주간이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정말로 거짓말 같은 일어났습니다. 상황은 똑같았습니다. 직장도 그렇고 주변의 사람도 그렇고 모든 상황이 똑같았지만 무언가 일이 저절로 되어나간다,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이 돕는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상했습니다. 생각, 느낌, 감정뿐만 아니라 일하는 성과도 눈에 띄었습니다.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그렇게 무겁던 일들, 그 일만 생각하며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제발 이일만큼은 안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 일이 가벼워지고 즐거웠습니다. 마음도 가벼워졌습니다. 그야말로 경쾌해졌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자기가 그러하니 주변사람들도 다 밝아졌는데, 그들 중 몇 사람이 자기에게 ‘이번 주는 기분이 참 좋습니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님을 영접할 때 그때에 다 빛이 되고 소금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내가 소금이 되려고, 내가 빛이 되려고 따로 애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는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두 번째, 기독교 신자들 중에 빛이었고 소금이었다가 점점 더 그 맛을 잃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처음에는 본인 자체도 신앙생활이 참 즐거웠고, 다른 사람들도 저 사람이 점점 변해간다고 이야기했고, 가까이 있는 아내도 남편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점점 더 그것이 아닌 것으로 바뀌어갑니다. 어느덧 빛을 잃어버리고 소금의 맛을 잃어갑니다. 나중에는 더 이상 빛도 아니고 소금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 옛날 세상 살던 사람과 똑 같은 사람으로 됩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존재론적인 이유입니다. ‘being’의 문제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처음에 빛과 소금이 되었던 것은 예수님께 붙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었는데,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떨어지면서부터 더 이상 빛이 안 되고 소금이 안 된 것입니다. 소금이 되고 빛이 되었던 것은 예수님께 붙었기 때문인데, 멀어지면서 떨어지면서 맛을 점점 잃고 이제는 아예 그런 존재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요한복음 15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느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르 ㄹ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4-5)
예수님을 떠나게 되면,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빛도 소금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맨 처음 보였던 빛의 모습, 소금의 모습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이든지 어떤 방식이든지 어떤 모습이든지 계속해서 예수님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쉽지가 않습니다. 찬양대원은 찬양대에 앉아있을 때 제대로 예수님께 붙어있는 것입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은 교회학교 교사 역할을 하고 있을 때 제대로 예수님께 붙어있는 것입니다. 빨간 막대기를 들고 차량 안내를 하시는 분들은 그 막대기를 들고 있을 때 예수님께 붙어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피부로 못 느끼겠지만 이것을 아셔야합니다. 어떤 형태이든지 간에 붙어있어야 합니다. 코로나 때문에 찬양대를 못하면 다른 모습으로, 교사를 못하면 또 다른 것으로 예수님께 붙어있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해야합니다. 존재의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점점 멀어집니다.
두 번째 행위론적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doing’의 문제입니다. 결론적으로 먼저 말씀드리면, 기독교인들이 자기희생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빛이 되고 소금이 되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은 죽으시고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모든 것을 희생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여러분들은 예수님께 붙어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었는데, 예수님은 지금도 십자가에서 그 고통을 당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 덕분에 이 은혜를 누리고서도 나는 희생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옛날 귀한 어른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데, 우리는 염치없이 그 앞에서 복만 받으려고 한다.’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은커녕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빛도 소금도 잃어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빛이 빛이 되기 위해서는 계속 태워야합니다. 소금이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녹아야합니다. 당연하게 기독교 신자들도 계속해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처음에는 예수님께 붙음으로 말미암아 자동적으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었지만 이후에는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예수님께서 과거에 하셨고 지금 하시는 것처럼 나를 태우고 나를 녹일 때 계속 소금의 역할 빛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모두들 너무 쉽게 예수를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주신 은혜를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나를 잃어버릴 때, 나를 녹일 때 나를 태우고 다 버릴 때 그때서야 가능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 땅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수없이 그 말씀을 하시는데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당장 손해 볼 것 같아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기희생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런 사정 때문에 저런 이유 때문에 나를 희생하지 않고 안 녹이고 안 태우기 때문에 나 때문에 세상이 어두워지고 맛이 없어지고 따라서 나도 세상 살 맛이 없습니다. 내 자신도 썩어가는 것을 방지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을 태워서 빛의 역할을 제대로 하라, 여러분들이 녹아져서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하라고 고 하신 것은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손해 끼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절대로 아닌데 우리는 산술적으로만 계산합니다.
기독교인들을 향해서 ‘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빛이다.’ 라고 말씀하신 뒤 예수님께서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은 우물쭈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직설적으로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저를 비롯해서 목회자들이 이 말씀을 할 때 우물우물하고 맙니다. 제대로 했다가는 교인들이 싫어할까 걱정해서입니다. 목사님이 저런 소리만 한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우물쭈물 비겁하게 슬쩍 말합니다. 말 안 하면 안 되니까 슬쩍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못하면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서 밖에 버려져서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15:4-6) 라고 아주 직설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소금이 아니면 사람들에게 밟히게 되고, 여러분들이 나에게 붙지 않아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면 화목火木거리가 되어서 사람들이 모아서 불태운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크기를 재는 중요한 척도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할 때, 나를 위해서 하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즉 자기 희생을 하는 사람인가? 여기에 따라서 사람의 크기가 많이 달라집니다. 많이 클만한 사람, 어른이 될 만한 사람인데 한 평생 좁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늘 자기를 위해서 살고 기껏 해봐야 내 가족 몇 명만 위해서 살다보니 좁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 살다보니 나중에 정말로 어른이 될 만큼 나이가 들었을 때에도, 많은 재력을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좁쌀로 끝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정말로 좁쌀로 살 수밖에 없을 것 같고, 배운 것도 별로 없고 모은 돈도 별로 없음에도 어른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희생이 있는 사람입니다. 지난 시대에 기독교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크고 위대했던 것은 자기희생이 있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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