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가치는
마태복음 5:28~38
최근 대법원장의 처신에 대한 여러 보도들을 대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고 속이 상할 때가 많았습니다. 특히 마음에 걸린 부분은 부하 판사가 사표를 제출했는데, 그 수리를 거부했던 일입니다. 참으로 참담한 것은 사표 수리를 거부한 이유가 사법부 최고 어른이라는 대법원장이 정부와 여당의 비위를 맞추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속이 상하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분이 많이 찬 것은 첫째는, 판사는 특별한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대법원장은 물론이고 모든 판사들의 판결 권한은, 하나님께서 각별하게 맡기신 것인데, 마치 이것을 자기네들의 고유 권한으로 생각하는 것은 판결의 본래 주인이신 하나님께 대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의 법에 ‘과연 그런 법이 어디 있는가?’ 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특별히 법을 더 지켜야할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이 법을 가지고 그럴 수 있는가? 법에는 쓰여 진 법뿐만 아니라 양식의 법도 있고 상식의 법도 있는데, 법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알 수가 있는데, 만들어진 법도 교묘하게 벗어나가고 상식, 이성, 양식에 의한 법도 그냥 범하는 것, 적어도 그것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속된 표현이 떠올랐습니다. ‘이웃집 여자 탐나서 내 자식 사지로 몰아낸 아버지’ 이것보다 하나도 못할 것 없습니다.
오래 전에 보았던 미국 드라마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미국 대통령에게 부통령을 다시 세워야하는 사정이 생겼습니다. 문제는 대통령이 지명한 부통령 후보가 하원의장이 거부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원의장 협조 없이는 국회 인준이 불가능한 상황, 그런데 의외의 일이 일어납니다. 하원의장이 부통령 후보를 만나서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조건을 제시합니다. ‘내가 이번에 당신을 도와줄 텐데, 그러면 당신은 내게 빚을 진 것입니다.’ 나중에 갚으라는 말입니다. 부통령 후보는 당면한 문제는 해결되겠지만 무척이나 찜찜한 심정으로 하원의장과 헤어집니다. 부통령 국회 인준은 하원의장 협조로 무난히 처리되었습니다.
그 후에 대통령과 하원의장 간에 심각한 의견 대립이 생겼습니다. 국회에서 표결을 하는 상황까지 치달았습니다. 대통령도 하원의장도 국회의원을 상대로 치열한 아군 규합 작업에 돌입합니다. 열심히 양쪽에서 작업을 합니다. 국회의원들의 표심이 정해졌습니다. 공교롭게도 대통령 편, 하원의장 편 가부 동수입니다. 이런 경우에 미국 법은 부통령에게 캐스팅보트를 부여합니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부통령으로서는 당연하게 대통령을 지지해야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이 되었습니다. 하원의장은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드디어 지난번의 그 빚을 돌려받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 것입니다. 하원의장이 부통령을 만납니다. 이전에 자기에게 진 빚을 갚으라고 요구를 합니다.
국회에서 표결이 시행됩니다. 표결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대통령 편, 하원의장 편 가부동수입니다. 이제는 부통령이 결정해야할 상황입니다. 부통령이 단상에 섭니다. 대통령은 그 상황을 짐작하고 깊은 실의에 빠집니다. 반면에 하원의장은 부통령에게 뒤통수를 맞고 흙빛이 될 대통령 얼굴을 상상하며 즐거워합니다. 드디어 부통령이 결정권을 행사합니다. 부통령의 선택은 기대가 가득해서 환하게 웃고 있던 하원의장이 아니라 대통령이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나를 믿고 부통령으로 세워준 대통령을 배신할 수가 있는가? 흙빛 대통령 얼굴을 상상하던 하원의장의 얼굴이 참혹한 흙빛으로 변합니다.
그 다음날 아침입니다. 부통령이 아침 일찍이 대통령을 찾아가서 사표를 제출합니다.
참 멋있는 부통령입니다. 드라마이지만 속이 시원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정치인들이 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통령은 부통령다워야 하고, 대법원장은 대법원장다워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도 마찬가지로 교회는 교회다워야 하고, 목사는 목사다워야 하고, 신자는 신자다워야 합니다. 만약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목사가 목사답지 못하고, 신자가 신자답지 못하면 길바닥에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밟힐 뿐입니다. 제 말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입니다. 그리고 대통령, 대법원장이 대통령답지 않고 대법원장답지 않으면, 온 세상의 하나님께서 그들 또한 길바닥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율법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이렇게 들었지만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라는 말씀을 계속해서 하십니다. 오늘 본문 21절과 22절에서 먼저 그것을 말씀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다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의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리고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7-28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33절과 34절에서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시고, 또 38절에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43-44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이다, 달라야 한다, 다르게 살아야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극적으로 예를 든 것이 오른뺨 맞으면 왼뺨을 내어주라는 말씀입니다. 뺨 맞는 것은 몸에 매를 맞는 것보다 훨씬 힘듭니다. 견디기 어렵습니다. 몸에 맞는 것은 잠시 생각하고 잊어버릴 수 있지만, 뺨 맞는 것은 오래 오래 기억납니다. 한 번 맞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맞고 난 후 1년 뒤에도 3년 뒤에도 5년 뒤에도 계속 맞는 그런 마음의 고통입니다. 이처럼 뺨맞는 것은 힘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 여러분들도 쫓아가서 뺨을 때리고 싶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아니다, 차라리 한 번 더 때리라고 뺨을 내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하시면서 그렇게 못되게 뺨을 때리는 사람, 때리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여러분은 상대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속옷, 겉옷을 말씀하십니다. 옛날 유대인들의 속옷은 통자로 되어있습니다. 팔과 다리만 내도록 되어있었는데, 이것은 매일 입고 사는 옷이고 집에서도 입는 옷이기 때문에 웬만큼 가난한 사람들도 여벌 옷 한 벌 정도는 있습니다. 그러나 겉옷은 거의 한 벌밖에 없습니다. 바깥에 나갈 때 항상 입어야 하고 잠잘 때 깔고 덮는 것이 겉옷입니다. 그런데 빚을 못 받자 법정을 통해서 속옷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리 빚 받을 것이 있어도 그처럼 인간 같지 않는 사람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 때문에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 원래 저런 인간이려니 하고 없어서는 안 될 겉옷마저 벗어줘 버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억지로 오리를 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십리까지 가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페르시아부터 내려온 그 당시의 우편 제도입니다. 지금이야 워낙 좋지만 당시는 사람이 직접 가야 했습니다. 먼 길을 가기 위해서 중간 중간마다 역이 있었습니다. 그 역에는 우편원들을 위한 음식도, 쉬고 잠도 잘 집도, 말 먹이도 말도 준비해놓습니다. 특별한 경우에 강제 동원할 수도 있었습니다. 모자랄 때 사람들에게 음식 가지고 오라, 사료가지고 오라, 또 말 좀 빌리자, 어떤 때는 사람까지 빌리는 일이 있었는데, 오늘 말씀하시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기진해서 못 지고 가시니까 병정들이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당신이 지고 가라고 해서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간 일을 아실 것입니다.
힘 있고 권력이 있다고 횡포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 힘이 있다고, 세상 권력이 있다고, 법 가지고 있다고 횡포부리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은 그런 사람들을 상대도 하지 말라 고 말씀하시면서 차라리 법 가지고 힘 가지고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오리가 아니라 십리까지 ‘가줘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아주 중요한 핵심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은 그런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보면 너무 힘들고 속상합니다. 뺨 맞은 것 생각하면 오래 오래 갑니다. 그런 것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한 번 맞았으면 되었지 또 생각하고 생각해서 두 번 맞고 세 번 맞을 필요가 있느냐? 못된 인간 때문에 그렇게 고통 받았으면 되었지 그것을 생각해서 또 당할 일들이 어디 있는가? 5년 뒤 10년 뒤까지 당하고 또 당할 필요가 있느냐? 그런 것 잊어버리고 얼른 고개를 돌려서 여러분들의 시선을 하나님께서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 이 세상의 주인이시고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하나님, 그 뿐만 아니라 나를 그렇게나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속상하다고 내가 원수를 갚아야겠다고 나서지 말고 여러분보다 훨씬 원수를 더 잘 갚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라, 여러분들이 괜히 손보려고 하지 말고 진짜 손을 제대로 보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여러분들은 하나님만 쳐다보라는 말씀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있을 때 도와주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저 도와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고 말씀하시는데, 참 옳은 말씀이고 좋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살아야합니다. 능력이 있어야 도와주고 꾸어줄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냥 도와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무슨 돈으로 돕느냐? 내가 무슨 힘으로 그렇게 하느냐?’ 하지 말고 그 사람들을 거절하지 말고 주라고 하십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다른 것 보지 말고 예수님을 보라 하나님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소리 같지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의미는 정확하게 이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소위 똑똑한 사람들의 눈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습니다. 본인은 힘들고 고통스럽고 가슴 아플 것 같지만 분명하게 아십시오. 문제의 해결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악한 사람들과 대적하지 않는 것, 그 사람들과 싸우지 않는 것, 그것들은 결코 여러분들에게 짐이나 부담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들에게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복은 너무 많습니다. 너무 많은데 받아갈 사람이 없어서 자꾸 쌓입니다. 받아갈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순간순간 보고 계십니다. 누구에게 복을 줄까? 부디 이 복을 받을만한 자격, 가치를 만들어라. 여러분들이 뺨 맞은 것, 손해 본 것 그 모든 것 다 하나님께서 갚아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아십시오. 조그마한 복은 하나님께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다 줍니다.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에게 다 줍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라는 45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큰 복은, 진짜 쓸 만한 복은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체험하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받을만한 사람을 찾고 계시다가 찾으시면 부어주시는데 끝이 없습니다. ‘이제 됐습니다.’ 라고 할 정도입니다.
다윗이 성전 짓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나중에는 하나님께 ‘하나님 너무 많습니다. 너무 많아서 다 채울 데가 없습니다.’ 라는 기도를 합니다. 그런 일이 여러분들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하실 것은, 이 사람을 보고 저런 일들을 보고 속상하고 힘들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을 ‘갖추어’ 나가면 됩니다. 자격 있는 사람, 가치 있는 사람, 복 받을 만한 사람,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면 됩니다. 그렇게 인생 살다보면 손해 보는 일도 있고 힘들어 견디지 못할 일들도 있지만 그러나 절대로 잘못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그 일을 보고 있으면 더 힘들지만, 하나님을 보면 일이 사람이 힘들 지가 않습니다. 속상하지 않습니다.
한 의사가 아프리카 외진 마을에서 봉사를 했습니다. 그 마을에서 선진 교육도 받은 아주 똑똑한 젊은 청년을 알게 됩니다.
어느 날 그 청년이 청혼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 마을에는 독특한 결혼 풍습이 있습니다. 청혼할 때 남자가 암소를 끌고 처녀 집에 가서 ‘암소 받고 딸 주세요.’ 라고 말합니다. 암소를 끌고 가는데, 특등 신부감은 암소 세 마리, 좀 괜찮은 신부감은 암소 두 마리, 보통 신부감은 암소 한 마리를 끌고 가는 풍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암소 아홉 마리를 끌고 갔습니다. 그런 예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드디어 청혼하는 날, 암소 아홉 마리를 끌고 가는데 사람들이 줄줄 따라갑니다. 청년은 이집 저집 잘난 집 다 지나서 허름한 집 앞에 가서 문을 두드립니다. 초라한 노인 한 분이 나왔는데, 그 노인에게 ‘암소 받고 딸 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뒤에 처녀가 나왔는데 사람들이 보기에 별 볼일 없습니다. 키는 좀 컸지만 그야말로 말라깽이고 얼굴도 초라한, 별다른 처녀가 아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무슨 까닭일까? 수군댔습니다. 청년은 그렇게 해서 결혼했습니다.
이 의사는 의료봉사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가끔 암소 아홉 마리 그 일이 생각났습니다. 오
랜 세월이 지나 휴가를 얻어서 그 마을로 갔습니다. 그 청년은 큰 사업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녁 시간에 그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서 식사를 할 때 그 뒤 이야기를 물었지만,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웃기만 했습니다. 이 의사는 계속 궁금했습니다. 그러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 한 여인이 차를 들고 들어왔습니다. 대단히 아름답고 우아했습니다. 영어도 유창하게 했고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웃음이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그때 본 그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제서야 사업가가 말합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바로 옛날 그 사람입니다.’ 의사가 깜짝 놀랍니다. 전혀 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청혼한 그 아가씨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사랑한 여자입니다. 저는 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마을은 몇 마리 암소를 받느냐가 여자들 세계에서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저도 그 관습을 무시할 수 없어서 암소를 몰고 갔습니다. 그 당시 제 아내의 가치는 암소 한 마리면 충분했습니다만 저는 제가 함께 살아야할 내 아내가 암소 한 마리의 가치, 그런 여자로만 계속 살 것인가? 생각하고 고민하다가 큰 결단을 했습니다. 나는 암소 아홉 마리 가치가 되는 그런 아내와 살고 싶다, 그래서 아홉 마리를 몰고 갔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제가 저 아내와 함께 살면서 저는 한 번도 아내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처음에는 좀 의아하게 생각하더니 그 후 아무 말 하지 않고 스스로 노력했습니다. 영어도 배우고 책도 보고 스스로 가꾸기도 하고 운동도 하고 몸도 만들고 인격을 만들어 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된 사람이 바로 저 사람입니다.’
남편이 인정해준 가치를 아내는 이루어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실 우리 모두 이전에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는 이상의 가치로 세워주셨습니다. 어느 정도 가치인가? 당신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죽을 만큼, 그 죽음 대신 여러분들이 죽지 않고 살만큼의 여러분들의 가치를 높이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기대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가치를 만들면 좋겠다. 내가 세워준 내가 자리매김한 그 가치보다도 더 높은 그런 사람이 되어서 당신이 준비하신 모든 좋은 것을 다 받아 누리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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